제자가 되는 일이 그리스도 안에 그리고 그분이 계시는 곳에 머무르는 일이라면, 우리도 우리 앞에 타자를 위한 공간을 열어 줄 수 있어야 합니다. 즉,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하셨듯 주변화되고 배제된 사람과 얼굴을 마주할 공간을 마련해야 합니다. 인간이 그어 놓은 경계를 넘어 타자를 위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그의 갈망과 필요에 적절히 반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성경 본문을 보면 스승 앞에 있는 마리아와 달리 마르다는 소외된 듯한 인상을 받습니다. 하지만 예수께서는 마르다에게 다른 방식으로 공간을 내어 주십니다. 마르다가 음식 준비를 돕지 않는 마리아에 대해 불평하자, 예수께서는 “네가 많은 일 때문에 근심하지만 몇 가지 혹은 한가지로 충분하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의 의도가 무엇일지 정확히 알 길은 없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많은 일로 마음이 요란한 마르다에게 ‘바쁘게 일할 때도 있지만 지금은 아니다’ 혹은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다’라고 알려주신 것입니다. 이로써 자기가 세운 기준을 맞추느라 마음의 여백이 사라진 마르다에게 지금 이 순간 무엇이 본질인지 보게 하십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속도에 취해 살고, 불안감에 늘 젖어 있습니다. 많은 일을 해야 하고 업적도 내고 성취도 해야 합니다. 그래서 불필요한 줄 알면서도 자신을 채찍질하고 남을 닦달할 때도 있습니다. 쉬어야 할 때 남의 시선을 의식하며 과시적으로 일하기도 합니다. 동료, 선후배, 고용인이 불필요하고 비본질적인 일로 분주함에도 ‘그렇게라도 하면 내게 조금이라도 이익이 되겠지’ 혹은 ‘나는 그것보다 더하면 더했지’라고 생각하며 내버려둡니다. 인간이라면 어느 정도 공유한 이 같은 모순적 심리 가운데서 오늘날 타자를 환대하기 어렵게 하는 경쟁적이고 속도 중심적인 문화를 읽어 낼 수도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유할 법한 이러한 실체 없는 불안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의 풍요에도 만족하지 못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은 소외시키는 불안, 타자를 온전한 사람이 아닌 시기와 경쟁과 이용의 대상으로 보게 하는 불안, 그러한 불안 때문에 인간은 본질에서 벗어나 분주하게 삽니다. 이러한 요동치는 자아를 멈추게 해 줄 권위 있는 목소리가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럴 필요 없다. 이걸로도 충분하다. 여기 공간을 마련해 두었으니 자리에 앉아 함께 기쁨을 나누자.”
김진혁, “환대의 신학” pp.160-1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