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본문에서 우리는 복음서 기자가 앞서 말하였던 빛이 어떤 종류의 빛인가를 알게 됩니다. 이 빛은 위로하는 은총의 빛인 그리스도이시고 본성적인 이성의 빛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요한은 플라톤주의자가 아니라 복음 전도자이기 때문입니다. 본성적인 빛 또는 이성을 받은 모든 사람은 그 빛에 따라서 그톨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그를 그렇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읍니다.
물론 그들의 본성적 빛도 신적 생명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빛과 삶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부여해 주지 못합니다. 실상 그것들은 참 빛에 대한 원수로 남아 있고 그 빛올 깨닫지 못하고 받아들이지도 않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이 복음에는 본성적 빛에 대한 어떠한 언급도 없읍니다.
다만 모든 것온 그리스도에게만이 관련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의도는 그가 참 하나님으로 인정될 수 있기 위해서 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 복음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복음은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것에 대해서,다시 말해서 이러
한 믿음이 하나님의 자녀들올 산출한다는 것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용어들은 선택된 용어들로서 이 어귀들은 행위와 율법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강력하게 공격합니다.
선행은 결코 인간을 변화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비록 의로운 행위들을 행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행위들을 하고一최소한 그들의 사고 방식에 따라一행위를 개선한다고 하더라도 그럼에도 그들은 전과 동일한 사람으로 있고 그들의 행위들은 다만 위선이 그 비행을 은폐할 뿐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인간을 변화시키고 원수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듭니다. 신앙은 이러한 일을 은밀하게 행합니다. 그러므로 행위들이 본성적으로 나쁘지 않는 한 외적 행위들,입장, 삶의 방식은 그대로 존속합니다. 이러한 사실은 자주 설명되어 왔읍니다. 그리하여 신앙은 의와 구원의 전 유산을 가져다 줍니다.
그러므로 행위를 강조하는 거짓 교사들이 거짓으로 우리에게 말해주듯이 행위하는 수단에 의하여 이러한 유산을 획득해야,할 필요가 없읍니다. 왜냐하면 만일어느 누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그는 이미 이 부자관계 때문에 하나님의 유산을 소유합니다. 만일 신앙이 이러한 부자 관계를 수여해 준다면 선행은 무상으로, 댓가없이, 오로지 하나님을 영광되게 하기 위해서만이 있어져야 한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이러한 선행들은 신앙을 통하여 이미 구원과 하나님의 유산을 소유한 사람들에 의하여 수행됩니다.
마르틴 루터, 루터선집10-설교자 루터 중 “크리스마스 대예배를 위한 복음”, pp.142-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