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는 교만을 어리석어 보이게 한다. 진정으로 중요한 성적표에서 우리는 낙제점을 받았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셔야 했던 십자가를 올려다보면서 다른 사람들의 죄를 내려다보며 그들을 경멸할 수는 없다.

세상에는 오직 한 가지 종류의 죄인(멸망할 수밖에 없는 절망적인 죄인)과 오직 한 가지 구원의 길(주 달려 죽은 십자가)만 존재한다. 따라서 “할례자(종교적인 사람)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 할례자(비종교적인 사람)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롬3:30). 바울은 이 사실로 인해 차별이 불가능해진다고 말한다. 옛말처럼 십자가 발치의 땅은 평평하다. 우리 모두는 ‘밖에’ 있고, 복음은 ‘모든 사람’에게 각자의 선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후하심에 따라 ‘안에’ 들어올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가 그분께 받아들여지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안에 있는 것을 통해서다.

따라서 기독교의 차별점은 배타성이 아니라 ‘포용성’에 있다. 모든 세계관은 배타적이지만, 기독교는 파격적인 포용으로 이어지는 세계관이다. 팀 켈러의 표현을 빌리자면 “모든 종교는 배타적이지만 기독교는 세상에서 가장 포용적인 배타성을 지닌다.” 교회사를 공부해 보면 복음이 수 세기 동안 논란의 중심에 섰던 것은 누구를 배제했느냐가 아니라 누구를 포용했느냐 때문이었다. 궁금하면 확인해 보라.

약 150년 전 영국의 목사 C.H.스펄전은 복음이 종식시킨 영국 내 세 가지 유형의 교만을 규명했다. 그 교만들은 극심한 사회적 분열을 낳았다. 당시만큼이나 오늘날에도 이런 교만을 알고 경계할 필요가 있다.

 

J.D.그리어, “복음특강” pp.158-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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