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분노는 궁극적으로 사랑 때문이며, 그래서 그분의 사랑은 종종 진노로 표현된다. 레베카 퍼핏은 Hope Has Its Reasons(희망에는 이유가 있다)에서 이렇게 묻는다. “사랑하는 사람이 무분별ᄒᆞᆫ 행동이나 관계 때문에 망가져 갈 때, 그것을 보는 우리의 심정이 어떤지 생각해 보라. …… 그럴 때도 우리는 점잖게 받아 주기만 하는가?”

그녀는 자신의 두 친구가 재능이 뛰어난데도 마약을 남용해 파멸로 깊이 빠져드는 것을 보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들과 함께 있으면 나는 화가 치솟는다. 이렇게 말하고 싶어진다. ‘안 보이니? 너희가 어떤 문제를 자초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볼 때마다 너희는 자기다운 모습을 점점 더 잃어가고 있다고!’”

그녀는 또 이렇게 썼다. “참 사랑은 우리를 파멸로 몰아가는 기만과 거짓과 죄에 대항한다. 인간이 경험하는 분노와 사랑은 떼어 낼 수 없는 관계로 묶여 있다. (자아에 도치된) 흠 많은 죄인인 나도 다른 사람의 상태 때문에 이렇게 고통과 분노가 깊을 수 있다면, 그들을 지으셨고 도덕적으로 완전하신 하나님의 마음은 어떻겠는가? 분노는 사랑의 반대가 아니다. 사랑의 반대는 미움이며, 미움의 극한은 무관심이다.” 흠 많은 인간인 우리 안에서도 이처럼 사랑과 분노는 대립 개념이 아니며, 오히려 상호 의존적일 수 있다.

그것을 성경 도처에서 볼 수 있다. 성경에 확언되어 있듯이 하나님은 당연히 죄와 악을 대적하신다. 그런데 또 한편으로는 그런 주님이 죄 때문에 눈물 흘리신다. 죄 때문에, 그분의 “마음에 고통이 가득하다.”(창6:6) 하나님은 그분의 긍휼을 말씀하시면서도 이스라엘의 죄 때문에 눈물을 흘리신다.(호11:8) 예수님도 악한 예루살렘 때문에 눈물을 흘리신다.(눅19:1-44) 하나님은 냉혹한 신이 아니시지만, 그렇다고 죄와 타협하지도 않으신다.

성경에 계시된 그분은 진노의 하나님만도 아니고 사랑의 하나님만도 아니시다. 사랑과 진노의 하나님이시다. 그분이 거룩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분의 사랑도 거룩하고, 그분의 진노도 거룩하다. 이는 악을 대적하신다는 그분의 철칙이 내 삶에도 작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법을 거스르면 곧 나 자신을 거스르는 것이다. 그분이 우주의 이치를 그렇게 정해 놓으셨다. 우리는 죄를 짓고도 빠져나갈 수는 있겠지만, 그 죄의 결과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이 또한 그분의 사랑에서 비롯된 조치다.

 

팀 켈러, “용서를 배우다” pp.134-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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