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수많은 ‘신애'(영화 밀양의 여주인공)가 울부짖고 있다. 상처받은 과거에, ‘용서’라는 단어와 함께 떠오르는 트라우마에, 그런데도 끝까지 용서 못하는 자신에게 실망하며 괴로워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의 기도문을 철회할 생각이 없어 보이신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용서’를 구하시게 앞서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라고 기도하라 하셨던 게 눈에 띈다. 그렇다면 혹시 ‘용서’도 그런 의미가 아닐까? 인간이란 존재가 생명 에너지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양식’이 필요하듯이, ‘용서’ 역시 인간답게 살기 위해 요청하라 하신 것이 아닐까 싶다. 그렇다면 사랑이라는 종교적 언명을 달성하기 위해 용서를 말하신 것은 아닐게다. 죄지은 악인을 위해 착한 네가 좀 더 희생하라는 폭력적 의미 역시 더더욱 아닐 게다. 증오가 스스로를 해하기에, 그래서 자기 자신마저 사랑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기에 그것을 막아 주십사 요청하라는 말씀이 분명하다. 더 이상 ‘과거’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를 살게 하시기 위해서 말이다.

그렇다면 주님이 말씀하신 용서는 ‘그를’ 사랑하라는 게 아니라, ‘너 자신을’ 사랑하라는 의미이다. 그를 사랑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라도, 그를 놓아 보내야 한다.

 

손성찬, “사랑하느라 힘든 당신에게” pp.3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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