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이르노니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관계성에 대해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누군가에 대해 나쁜 생각만 품지 않는다면 이미 용서한 것이나 다를 바 없다고 여기며 무감각해합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에 대해 좋은 생각을 품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개의치 않습니다. 그러나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해 순전히 좋은 생각만 품으며, 온 힘을 다해 그를 참고 감당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바로 이 부분에서 진정으로 용서하기보다는 적당히 우회해 버리기를 잘합니다. 다른 사람을 감당하는 대신에, 그 사람 옆에 나란히 서 있으면서도 그 사람의 침묵에 익숙해지며 그의 존재 자체에 무관심해져 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용서란 참고 감당하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참고 감당한다는 것은 그의 모든 면을 참고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모습에서 참으로 불쾌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부분, 그의 잘못과 죄, 더 나아가 우리를 거스르며 대적하는 부분까지 포함한 모든 것을 끝까지 포기하거나 외면하지 않고 잠잠히 치고 감당하며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용서입니다!

용서한다는 것, 순전한 사랑으로 용서한다는 것, 그 사랑으로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끊어 버리지 않고 계속 참아 주고 감당하는 것은 결코 작은 일이 아닙니다.

용서는 시작도 끝도 없이 매일 끊이지 않고 일어나는 것입니다. 용서는 하나님에게서 오기 때문입니다. 또한 용서는 더불어 살아가는 삶에서 이웃과의 모든 부자연스러운 관계를 자유롭게 하는 원동력입니다. 우리는 용서함으로써 자기 자신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용서함으로써 자기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오직 다른 사람을 돕고 섬길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 이상 예민하게 반응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명예가 손상되지나 않을까 염려하며 마음을 쓸 필요도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에게 반복하여 불의를 행할지라도 더는 격분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을 끊임없이 판단할 필요도 없습니다. 다만 있는 모습 그대로 상대방을 품고, 아무 조건 없이 모든 것에 대해 끊임없이 용서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웃과 이런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고, 그 누구도 그 무엇도 우리가 누리는 평화를 깨뜨릴 수 없다는 사실은 진정 엄청난 은혜가 아닙니까? 우리가 소중히 여기는 우정이나 명예, 형제애가 확고하고 영속하는 토대 위에 견고하게 서기 위해 꼭 필요한 평화는 용서함으로써 가능합니다.(1935년 11월 7일, 핑켄발데, DBW 14, pp. 907-909.)

(출처 : 디트리히 본회퍼 40일 묵상. pp. 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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